
bittersweet
펩치 @pepchiii_NM
“넌 나를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민호.”
“연락하지 마. 당분간 너 안 보고 싶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기억에 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숨이 허옇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생각보다 날이 찼다. 서늘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뉴트는 코트 깃을 세우며 몸을 웅크렸다. 오늘따라 거리엔 커플들이 가득했다. 다들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지 손을 맞잡고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었다. 우습게도 이럴 때 옆에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서러워 뉴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민호와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민호를 만난 날의 기억이 흐려지지도 않고 머릿속에 남아 뉴트의 가슴을 후볐다. 만나서 저녁을 먹고,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한 편 보고는 손을 마주 잡은 채 뉴트의 집 앞까지 느릿하게 걸어가는 평범한 하루.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민호가 뉴트의 손을 놓지 않고 결심한 듯 한마디를 내뱉기 전까지는.
“같이 살자, 뉴트.”
폭탄처럼 날아든 말에 뉴트는 바보 같은 얼굴을 했다. 멍한 뉴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민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같이 살면 좋잖아.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네가 일도 있었고….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조금 걱정이 돼서.”
“아, 아니 민- 그게 아니라.”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사고. 그래, 사고라면 있었다. 길을 가다 자전거랑 부딪혀 다리를 살짝 다쳤던 사고. 크게 다치지도 않아서 병원에서도 별말 없었다. 그날 같이 병원에 온 민호의 얼굴이 심상치 않더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거였나. 쑥스러운 듯 콧등을 살살 긁적이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 다친 거 때문에 이러는 거 맞아?”
뉴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민호는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그 일 때문이야?”
“그 일이라니?”
“몇 년 전에 교통사고 났던 거.”
민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변화의 원인은 당황도 놀람도 아니었다. 기억과 함께 밀려들어온 슬픔이었다.
민호의 손목을 잡아채던 차가운 손의 감촉. 영화처럼 느리게 스쳐지나가는 뉴트의 옆모습과 뒤로 몸이 넘어가던 그 감각. 차에 부딪혀 몸이 붕 떠오르는 뉴트를 민호는 바닥에 나뒹굴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사고’는 그들의 일상을 일순간에 바꿨다.
병원에서는 뉴트의 다리 상태가 심각해 평생 절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그때의 민호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뉴트보다도 심각해보였다고 했다.
뉴트의 회복은 예상보다 빨랐다. 앉아있던 휠체어에서 한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던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숨죽여 뉴트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바닥에 발을 딛고 서는 순간, 사람들은 놀랐고 민호는 흐느껴 울었다. 다리를 평생 절게 될 거라던 그가 기적적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고 이후로 민호는 뉴트의 다리와 관련된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전거와의 사고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이 정도는 약국에서 약만 받으면 괜찮다는 뉴트를 병원에 데려간 것이 민호였다. 뉴트는 그의 반응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면서도 불안했다.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같이 살자는 민호의 말에 뉴트는 제 마음을 숨기기 급급했다.
“아직도 부담감 갖고 있는 거지.”
“…….”
“죄책감이 들어서 그래? 너를 구하다 내가 다쳐서. 그 일이 아니었으면 민호가 자전거 사고 따위로 같이 살지 말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 아냐.”
마음에도 없는 말이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입밖으로 내뱉어졌다. 말 한마디마다 달라지는 민호의 얼굴이 뉴트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나는 꼭, 네게-”
“야.”
거침없던 뉴트의 말에 브레이크를 건 민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한테 제대로 물어보기는 했어?”
“어?”
“네 생각이 나랑 같은지 나한테 물어보기는 했냐고.”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여태 민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뉴트는 조심스레 눈을 굴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는 떨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넌 나를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민호-”
“연락하지 마. 당분간 너 안 보고 싶어.”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간 민호의 뒷모습이 뉴트의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
지금 민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감기는 걸리지 않았을까. …이대로 영영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아니겠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아픔이 느껴졌다. 뉴트는 주머니 안에서 손을 쥐었다 펴며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거리를 걷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다들 손에는 하나씩 익숙한 종이 쇼핑백을 든 채였다. 한쪽 겉눈썹을 비틀며 뉴트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 디저트 가게나 작은 매대에서 하나 가득 초콜릿을 팔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달았다. 발렌타인데이. 괜히 밖에 나왔다는 생각에 뉴트는 이마를 짚었다. 발렌타인데이인 걸 깨닫자마자 왜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눈을 감은 채로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던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죄송해요!”
빠르게 달려오다 뉴트와 부딪힌 한 남자가 옆으로 넘어질 뻔한 뉴트를 잡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 쇼핑백의 내용물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남자는 떨어진 물건과 뉴트를 잡은 손을 저울질하다 결국 물건을 포기한 듯 뉴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저 물건이….”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비싼 건 아니고 포장된 초콜릿이에요.”
남자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했다. 애인에게 줄 건 아니고 그저 초콜릿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샀다는 실없는 얘기였다. 뉴트가 반응 없이 눈만 껌뻑이며 그를 쳐다보자 남자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제가 별 얘기를 다했네요.”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정신이 없어서.”
“혹시라도 문제 생기시면 제게 연락을-”
주머니를 뒤적여 명함을 꺼내려는 그를 뉴트는 손을 저으며 막았다.
“괜찮습니다. 이정도로 다쳤을 리도 없고요.”
“그래도 제가 신경 쓰이는데….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남자는 쇼핑백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화려한 상자에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그는 저 길 너머에 있는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산 건데 실수로 두개를 사버렸으니 부담 갖지 말라며 뉴트의 손에 초콜릿을 건네주고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폭풍 같은 사람과의 만남에 멍하니 상자 안 초콜릿을 바라보던 뉴트는 피식 웃었다.
한입에 쏙 들어갈 크기의 초콜릿은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한 모양이었다. 화이트 초콜릿과 마블링 된 겉면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뉴트는 이런 초콜릿을 하나씩 포장해서 팔기도 한다는 사실에 코를 찡긋거리고는 상자를 열어 초콜릿을 집어먹었다. 입 안 가득 달콤함이 퍼졌다. 익숙하지 않은 단맛에 혀가 움찔거렸다. 생각해보면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면 초콜릿을 먹을 일이 없었다. 이런 날에도 민호가 사오는 초콜릿이나 그를 위해 샀던 초콜릿을 몇 개 집어먹었던 게 전부였지만.
민호는 발렌타인데이를 좋아했다. 이맘때면 초콜릿 종류가 다양해져서 마음껏 초콜릿을 살 수 있다고 했던가. 그는 초콜릿을 가득 사와 주변에 쌓아놓고 먹는 걸 좋아했는데 항상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초콜릿을 잡고 한입씩 베어먹었다.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의 것도 반으로 잘라서 먹어야 맛이 잘 느껴진다는 그의 고집이었다. 초콜릿을 잔뜩 먹고 나면 손가락엔 어쩔 수 없이 녹은 흔적이 남았다. 민호는 그것을 대부분 입으로 빨아먹었지만 가끔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을 뉴트에게 가져다댔다. 엄지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뉴트의 입술에 묻히고는 소리 내어 웃는 모습에 처음엔 무슨 의도인지 몰라 왜 웃냐며 입술을 벅벅 닦으려 했었다. 그러나 올라간 팔을 붙잡는 손과 입술을 핥아내는 혀의 감촉에 뉴트는 민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부터는 민호가 초콜릿을 먹을 때면 일부러 입술을 내밀고 달콤한 그의 손가락을 기다리는 게 뉴트의 일이었다.
허, 하고 웃음이 샜다. 단맛은 사라지지도 않고 입안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의 산뜻한 단맛 뒤에 남은 사라지지 않는 질척한 단맛은 마치 후회를 닮았다. 연고 없는 사람이 건넨 작은 초콜릿은 제 목구멍에 그것을 진득하게 남겨놓았다. 사실 이제야 후회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미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민호와 연락이 없던 기간 내내 제대로 생활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실수하느라 바빴고, 집에는 쌓인 빨래와 설거지거리가 가득했다. 참 웃기게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민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저라도 민호가 그런 사고를 당했으면 걱정했을 게 분명한데. 사랑하는 사람의 걱정하는 마음을 부담감일 뿐이라며 일축해버리다니.
볼을 타고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손등으로 볼에 남은 눈물을 급하게 닦아냈지만 어느새 눈물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닦아내기가 무섭게 다시 축축해지는 볼은 차가운 바람에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얼음장 같은 손이 볼을 스치는 감각이 섬짓했다. 울음소리가 이로 꾹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웃는 민호의 얼굴이, 춥다며 핫팩을 챙겨주는 민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국 뉴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흐느꼈다. 이 순간 너무나도 민호가 보고 싶었다.
“뭐야, 청승맞게.”
바람에 실려 날아온 목소리는 담백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느릿하게 손을 떼어내자 따뜻한 손이 얼굴을 감쌌다.
“민, 호….”
뉴트의 앞에는 민호가 서있었다. 그는 뉴트가 오래전에 선물했던 남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언제 선물했는지 모를 오래된 목도리는 드문드문 올이 풀려있었다.
“왜 이러고 있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눈물 자국이 남은 뉴트의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뉴트의 목에서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가를 매만지는 손가락이 따뜻해서 뉴트는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 있는데 목구멍에서 둥그런 무언가가 차올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민호.”
“응.”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민호는 말없이 뉴트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어두운 색 눈동자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그거보다도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 있어서.”
볼을 감싼 손이 흠칫 떨렸다.
“미안해, 민호.”
“…….”
“내가 멋대로 판단해서, 흐으… 잘못했어.”
뉴트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민호는 옅게 웃었다. 눈가를 휘며 웃는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라 뉴트는 울컥 넘쳐버린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의 눈물에 민호의 손도 함께 축축해졌다.
“나는 가끔 생각해. 그날 차가 너에게 먼저 달려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너와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민호는 골똘히 생각하듯 눈을 굴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내가 죽든 심하게 다치든 널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을 것 같더라.”
“민호….”
“부담감?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민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운 눈가에 따뜻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사랑해, 뉴트.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모든 결정의 이정표가 돼.”
결국 수도꼭지가 터져버린 듯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일주일의 짧은 공백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었다. 민호의 손은 여전히 제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상냥한 손길에 뉴트는 민호와 눈을 마주했다.
“그만 울어- 잘생긴 얼굴이 이게 뭐야.”
“울어도 잘생겼잖아.”
민호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못하는 말이 없어.”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적대자 주변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빨갛게 부어있을게 분명했다. 머릿속을 차지하던 민호 생각이 잠시 멈추자 미뤄뒀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자리로 모든 것이 돌아오고 있었다. 민호가 제 옆으로 와줬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발렌타인데이 곧 끝나네.”
“그러게. 초콜릿… 주고 싶었는데.”
“뭐, 됐어. 같이 먹으면 되니까.”
뉴트는 눈을 깜빡였다. 운 탓에 눈앞이 흐려 민호가 무얼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적이는 흐릿한 움직임 뒤로 비닐포장을 벗겨내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민호를 바라보고 있던 뉴트의 입에 작은 초콜릿 하나가 쏙 들어왔다.
“사실 울어도 잘생기긴 했어.”
“응?”
“그래도 너는 입가에 초콜릿이나 묻히면서 웃고 있는 게 제일 나아.”
자동반사적으로 초콜릿을 우물거리자 민호가 뉴트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쿡쿡 웃었다. 손에 초콜릿이 묻어있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입술에서 진득하게 녹은 초콜릿이 느껴지는 듯했다. 민호는 뉴트의 양볼을 쥐며 입을 맞댔다. 뉴트는 자연스럽게 민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넘어왔다. 여전히 입안을 가득 메운 단맛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숨 쉴 새도 없이 밀려오는 달콤한 행복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되었다. 뉴트는 이 달콤함이 계속해서 입안에 머물러있기를 바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해피 발렌타인데이, 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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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
어느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따뜻한 햇빛,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 어우러져 소풍을 가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특히 오늘은 한 달에 단 하루, 다 같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놀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이 주방에 없어서 이른 새벽에 몰래 갈 필요가 없었다. 휴가와 겹친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2월 14일이다.
저 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완성된 초콜릿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몇 개 골라 상자에 옮겨 담았다. 어느 정도 상자에 초콜릿이 담기자 뚜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은 난장판이었지만 초콜릿 상자만은 깨끗해 보였다. 상자부터 전해주고 나서 주방을 치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발걸음을 조금은 빠르게 움직였다. 발렌타인 데이라는 비겁한 변명을 등에 지고선 그에게 초콜릿을 주기 위해 다가갔다.
***
민호와의 첫 만남은 박스 안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소리를 내는 기계 안에 갇혀있었다. 몸이 부유하는 느낌과 함께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머리를 쥐어 잡고선 입으로 되새겼다. 소냐, 위키드, 소냐, 위키.. 잠시만 누구라고? 소용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느새 잊어버려서 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기계가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멈추자 나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그저 낯선 장소에 있다는 공포감만이 나를 지배했다.
“뭘 봐? 똘추같이.”
문이 열리자 무의식적으로 위에서 뛰어내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말투와 다르게 순해빠진 그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다행히도 난 혼자가 아니었다.
*
“뉴트, 다녀왔어.”
“여기 물. 다친 곳은 없어?”
“응, 오늘은 천천히 달렸거든. 그럼 난 지도 제작실에 갈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호는 빈 물병과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지도 제작실을 향해 걸어갔다. 옆에서 벤이 자신도 저렇게 챙겨달라며 칭얼거렸지만 빈 바구니를 던져 그를 쫓아냈다. 부대장이면서 민호만 챙겨준다고 벤이 항의했지만 그는 치프 러너니까 챙겨준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벤을 쫓아내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자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민호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트, 미로는?”
“음, 어제랑 같지.”
“빌어먹을. 난 의료팀 막사 들렸다가 갈 테니까 민호랑 먼저 밥 먹어.”
어느새 다가온 알비는 미로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항상 같은 대답에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알비는 다친 아이를 확인하러 간다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고선 자리를 떠났다. 그것이 알비의 서툰 위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침묵으로 대신 답을 전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로 탈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현실을 깨닫게 되자 희망이 산산조각 나 가루로 변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미로에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내 목숨은 정말 끈질겼다. 이 사건 이후에 왼쪽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렸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 미로에서 본 민호의 표정이 내 숨통을 옭아맸다.
“민호, 밥 먹으러 가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 민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
“저길 봐! 민호 형이랑 토마스 형이 돌아왔다고!”
척의 외침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민호가, 미로에서, 살아 돌아왔다. 저 멀리서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멍청한 얼굴을 바라보자 그제야 그가 죽지 않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참은 오자마자 사고를 치더니 이제는 민호와 알비 모두를 구하고 돌아왔다. 민호와 신참이 미로 안으로 들어오자 흩어져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중 신참을 노려보는 갤리의 모습이 가장 도드라져 보였다. 신참, 그러니까 토마스는 눈치가 없는지 알비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리버를 봤다고 척의 물음에 대답했다.
“맞아. 게다가 죽이기까지 했지.”
민호의 대답에 아이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누어졌다. 드디어 그리버를 죽였으니 신참이 한 건 했다는 긍정적인 방향과 그리버에 대한 공포로 두려워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뉘어 순식간에 글레이드가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의 반응에 한숨을 쉬며 우선 치료팀에게 알비를 데려가 눕히라고 먼저 보냈다. 손뼉을 쳐서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내어 떠들지 말고 아침밥이나 먹으라고 아이들을 쫓아냈다. 신참마저 배고프다며 사라지자 민호만이 내 주변에 남았다.
“다녀왔어, 뉴트.”
“... 어서 와.”
민호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가 갑자기 팔을 잡아당겨 포옹하자 당황한 심장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민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수고했으니 밥부터 먹으라고 말을 건넸다. 팀장 회의를 핑계 삼으며 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몇 걸음을 벗어나기도 전에 얼굴에 화끈한 열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러지, 미쳤나.
*
갤리 새끼가 미쳤다. 제물이라니. 그는 토마스와 트리사를 그리버의 제물로 바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트리사가 올라오고 글레이드가 많이 변했지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미로의 문이 닫히지 않고 아이들이 그리버에게 잡혀가자 결국 갤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에 그리버의 침을 찌르는 토마스나 제물을 바치자는 갤리나 모두가 미쳤다.
“뉴트, 여기서 뭐해?”
“잠시 생각 좀 정리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왔어.”
아니, 제일 미친놈은 분명히 ‘나’다. 민호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이미 심장은 내 의지에서 벗어나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다. 좋아, 인정해. 나는 민호를 좋아한다.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좋아해서 한동안 피해 다닌 적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민호가 더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민호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내가 무척이나 끔찍했지만 난 이미 그에게 단단히 반해버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탈출할 거야, 아님 여기 남아있을 거야?”
“글쎄, 일단 토마스가 일어나야 결정할 것 같은데.”
“그럼 뉴트, 나랑 같이 나가자.”
뭐?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민호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길을 결정한 것 같았다. 민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미로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같이 나가자며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손을 멍하니 바라보자 이제 미로 안에서 달리는 것이 지긋지긋하다며 미로 따위 버리고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전했다. 그가 나에게 제안하는 순간 이미 나는 마음속으로 내 길을 결정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이 빌어먹을 미로 따위 때려치우고 나가자.”
***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로 탈출은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위키드 손바닥 안에 있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토마스는 아리스의 도움으로 위키드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들 덕분에 이젠 땡볕인 사막을 걸어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오른팔 조직의 본거지를 찾으러 가야 한다. 산 너머에 오른팔 조직이 있다는 사실만 믿고 무작정 대여섯 시간을 걸으니 아이들이 슬슬 지쳐가지 시작했다.
“저 바위 아래에 앉아서 쉬자.”
“그래, 물 얼마 없으니까 한 모금씩만 마셔.”
민호는 익숙하게 아이들을 이끌어ㅅ 바위 아래로 향했다. 물을 마시려는 아이들에게 부드럽게 충고해주고선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왼쪽 발목이 욱신거려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벌겋게 부어오른 발목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아까보다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옷가지를 찢어 단단히 발목을 고정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민호는 지금 고정하지 말라고 막았다. 그러더니 익숙하게 발목을 잡고선 부드럽게 문질렀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여기서 좀 더 쉬어야겠어.”
“고마워, 민호.”
“별말씀을. 가방 위에 다리 올려, 붓기라도 빼.”
가방 위에 다리를 올리자 민호는 얼마 없는 물을 손수건에 묻혀서 발목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여기서 좀 더 쉰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내 앞에 서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
“민호, 민호!”
“토마스, 안돼!”
민호가 위키드에게 붙잡혀 끌려가자 나는 토마스가 그를 구하기 위해 뛰쳐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브렌다와 호르헤를 만나 오른팔 조직을 찾았지만 트리사의 배신으로 다시 위키드에게 붙잡혔다. 게다가 민호는 납치되어 버그에 강제로 끌려갔다. 바로 눈앞에서 전기 총에 맞아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민호의 모습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사람이 더 필요하다.
“정신 차려, 똘추야! 너마저 끌려가면 민호는 어떻게 구하라는 거야.”
“뉴트, 민호를 구하러 갈 거야?”
“당연한 말을. 내 남은 시간 전부를 받쳐서라도 그를 구하러 갈 거야.”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줘, 민호. 곧 구하러 갈게.
***
“민호!”
“맙소사, 이거 꿈 아니지?”
위키드의 군인을 피해 쫓기는 도중에 갑자기 덩치 큰 누군가가 나타나 그들을 날려버렸다. 토마스와 나는 얼떨떨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군인을 날려버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민호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세게 끌어안았다. 약간 수척해진 듯 보였지만 민호는 여전히 환하게 빛이 났다. 안부를 더 묻기도 전에 위키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을 피해 비어있는 실험실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갤리의 도움으로 위키드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계획이 꼬여 탈출이 불가능해졌다. 당황한 사이에 문 밖에서는 절단기로 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창밖을 보더니 좋은 생각이 있다며 민호와 소화기를 집어던졌다. 설마.
“달려서 뛰면 될 것 같아.”
“괜찮겠어?”
빌어먹을, 토마스. 민호가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미로에서의 기억 때문에 걱정되겠지만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면 내 빌어먹을 트라우마도 무시하고 뛰어내릴 수 있다.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며 이게 정말 괜찮은 방법인지 고민했다. 민호도 같은 생각인지 토마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자신 있어?”
“딱히.”
“좋아, 갑자기 기운이 확 나네(We are all bloody inspired)."
철컹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뒤에서 보이는 쥐새끼의 얼굴을 뒤로하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
“뉴트, 조금만 버텨. 알겠지?”
“고마워. 고마워, 민호.”
다 같이 이동하려고 했지만 반란군과 나로 인해 점점 발걸음이 뒤처지자 결국 팀을 나누게 되었다. 민호와 갤리가 먼저 가서 혈청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잔뜩 울상인 민호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말을 건네며 그를 먼저 보냈다. 내가 걱정되는지 자꾸 뒤돌아보는 민호에게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민호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신 차려, 뉴트. 지금 가야 해.”
“이걸 받아, 토마스.”
“나중에 해. 나중에.”
“제발. 제발, 토미(Please. Please, Tommy)."
알았어. 토마스의 대답에 목걸이를 건네주고선 그에게 몸을 기대 일어났다. 남은 힘을 짜내는 거야. 둘이 해보자. 토마스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웅웅거리며 맴돌고 다리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면서 최대한 앞으로 움직였다. 간헐적인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온몸이 마비되어 더 이상 움직이질 못하자 토마스는 나를 질질 끌면서 데려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저 멀리서 들리는 방송 소리와 함께 내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
“-. -트. 뉴트!”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토마스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사이에 토마스는 칼을 빼앗아 멀리 던져버렸다. 저 멀리서 보이는 민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두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일어나 보니 바닷가였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쓰러진 건 위키드인데 바닷가라니. 그나마 민호가 옆에 앉아있어서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다. 내가 쓰러진 이후의 상황은 매우 순조로웠다. 치프 러너의 명성답게 가장 먼저 도착한 민호는 내 상태를 보자마자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토마스는 위키드에 들어가 치료제를 챙겨 옥상으로 탈출했고 나에게 투여했다. 그 과정에서 위키드 총장과 쥐새끼, 트리사가 죽었지만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뉴트, 이제 몸은 괜찮아?”
“음, 뒷목이 좀 뻐근한 거 같아.”
당황하는 민호에게 장난이라고 대답하자 그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정신이나 차리고 나오라며 민호는 빠른 발걸음으로 막사에서 벗어났다. 재빠르게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이 터져 침대에서 한바탕 뒹굴었다. 쑤시는 온몸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호와 나는 미로에서는 치프 러너와 부대장이었고, 위키드에서는 면역인과 비면역인이었다. 하지만 위키드를 벗어나자 우린 생존자라는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젠 민호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되었다.
*
손에 긴장으로 땀이 가득 찼다. 상자가 땀에 젖어 눅눅해질까 걱정되어 바지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아내고선 다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보다는 큰 사이즈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딱 적당한 크기의 초콜릿 상자가 내 손에 들려있다.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장소에서 벗어나자 큰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아있는 민호를 발견했다. 떨리는 몸을 이끌어 그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민호, 오늘 발렌타인 데이래.”
“발렌타인 데이?”
“응, 브렌다가 초콜릿 주는 날이라고 알려주었어.”
사실은 연인들 사이에서 초콜릿을 주는 날이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해서 지금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무심해 보이도록 신경 쓰며 민호에게 초콜릿 상자를 건네주었다. 때마침 따스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여기 초콜릿.”
“.. 고마워, 뉴트.”
“응, 해피 발렌타인 데이.”
좋아해, 민호.